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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과 사랑

편저자 백조종 | 15,900| 439

ISBN 9788990509338 (03040) | 출간일 2011831

분야 : 역사와 문화 > 주제로 읽는 역사 > 인물사

취재 및 확인 : 저자 백조종 010-4290-2711 부코출판사 편집자 : 010-5575-0308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3-68 부코빌딩 5층 부코주식회사 e-mail : bookian@paran.com

부코 출판사

다쿠미는 조선 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했다. 당시 조선의 산들에 대해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지적법에 의해 많은 토지가 소유자 부재라는 억지 주장을 하며 몰수했다. 그리고, 그 토지와 임야를 일본으로부터 온 이민자나, 일본정부에 협조적인 조선인에게 차례차례로 불하해 버리고 있었다.

새롭게 지주가 된 사람들은 토지에 집착이 없고 곧바로 나무를 벌채해 팔아 버린다. 한반도의 산들은 단단한 암반이며 거기에 얇은 표토가 가리고 있다. 민둥산이 된 조선의 산들은 금새 보수력을 잃어 홍수를 일으켜 버리게 되었다. 홍수와 가뭄으로 조선 민중이 겪는 고통은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에 마음 아파한 다쿠미는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을 고안해 조선의 많은 산들을 복원했다. 현재 한반도 산림면적의 약 37%가 다쿠미의 노천매장발아촉진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녹지라고 하며, 다쿠미가 개발한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은 오늘날 미국에서도 각광받는 육묘 및 산림녹화 방식이라고 한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고 주장하며,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속국인 한국을 구원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자체가 중국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쿠미는, 조선의 밥상을 예로 들어, 조선의 문화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문화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원초적인 근간은 문화이다. 조선인들의 식문화가 펼쳐지는 인 소반(밥상)이라는 것은 중국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다쿠미는 중국에는 없고 조선만이 가지고 있는 조선 특유의 소반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이 일상 사용하는 많은 [생활공예품]들을 통해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다쿠미는,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문화적 독립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의 조선의 외교적 독립도 확신했다. 그리고 염원했다. 실제로 다쿠미가 죽고 14년후에 조선은 독립되었다.

[조선 도자기의 ] 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은, 조선사람이 아닌, 일본인 아사카와 노리다카이다. 노리다카는 일본에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일본도자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며, 일본도자기의 원류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 심취하게 된다. 졸업후 한국의 도자기를 연구하기 위해 조선땅으로 건너와 미술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조선의 공예, 도예를 연구하게 된다. 노리다카는 그 자신이 직접 회화나 조각도 했지만, 그 보다는 조선의 공예와 도예에 대한 연구가(硏究家) 및 컬렉터(collector)로서 더욱 빛을 발했다. 노리다카의 성장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복자로 태어난 막내 동생이 다쿠미이다. 다쿠미는 농업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형이 있는 조선땅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 공무원으로 일한다. 다쿠미는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기 위해 조선의 온 산야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학교에 몸담고 있느라 필드(Field)연구에 제약이 컸던 친형 노리다카를 위해, 조선 각지의 가마터에서, 도자기와 도자기 파편을 구해 형에게 제공했다. 노리다카가 [조선 도자기의 ]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생 다쿠미가 [조선 도자기의 천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총독부 공무원이었던 다쿠미는 길에서 조선인 걸인을 만나면, 남자걸인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여자걸인에게는 수중에 있는 돈을 전부 다 쥐어주었다. 다쿠미는 시내의 일본인 밀집지역에 살지 않고, 조선인 마을에서 조선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다쿠미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어를 썼으며, 일본순사의 조선인 박해를 조선인들과 함께 감내해냈다. 다쿠미는 아이들을 귀여워해서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과자를 사서 나눠주곤 했다. 다쿠미는 당시 조선 최고의 인텔리 였던 [폐허] 동인지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소작농이나 천민 출신의 조선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다. 다쿠미는 사람을 대할 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국적도 종교도 초월했다. 다쿠미가 죽자, 서로 다쿠미의 상여를 매겠다고 나선 조선인들로 인해 청량리의 교통이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당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저항하고 있던 동아일보였지만, 조선 총독부 임업연구소 소속의 日人공무원의 사망에 대해서 사실상의 추도기사를 냈을 정도였다.

다쿠미의 고향은 야마나시현 호쿠도시 다카네정이다. 1000년전 신라의 삼국통일로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해서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이다. 다쿠미에게는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산야와 예술을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한국의 흙에 묻힌 일본인, 그의 저서 말미에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기보다 지니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 민족 광복의 빛을 앞서 밝힌 일본인 다쿠미는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 산림녹화에 크나큰 공헌을 했으며, 한국의 목공예 및 도자기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유지 및 전승하려 노력하였다.

우리나라의 우수한 민속 문화를 해외 (인도, 일본)에 전파하고, 일본 민예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한국의 민예운동을 이끌며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던 식민지 시절이었지만, 일본인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한국인을 도왔으며, 한국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한복을 즐겨 입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이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일본 순경이 버스에서, 또는 강연장에서 한복을 입은 다쿠미를 한국인으로 잘못 알고 자리를 비키라하면 선선히 비우는 가장 낮은 자세로 삶을 살았다.

이 책이 다쿠미 선생의 인류애를 본받고 이어받아 시대와 국경을 뛰어 넘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도서명/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과 사랑)

저자 및 역자/

백조종 (편저자)

출판사명/

부코 (.북키앙 , .만물상자)

출판년월일/

2011831

정가/

15900

판형| 제본| PAGE/

신국판 | 무선제본 | 439| 610g | 152*225*23mm

관련분류 주제별 분류 (YES24 분류 방식 참조-복수 선택 가능) /

국내도서 > 문학 > 에세이 > 한국 에세이

국내도서 > 사회 > 정치/외교 > 외교/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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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인물 > 역사/시대적인물

책소개

한일양국의 지식인, 정치인, 문화예술인, 학자 등의 글 88편이 실려 있다. 염상섭, 나혜석, 변영로, 오상순, 김억, 남궁벽 등이 활동했던 유명한 문예동인지 [폐허]의 동인들과 교류하던 다쿠미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복을 입었으며, 지위고하·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한국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국적과 종교를 초월하여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국의 민둥산에 나무를 심어 숲을 살리고 홍수와 가뭄을 막는 한편,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던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보존하고 부흥시켰으며, 한국의 문화적, 외교적 독립을 염원했던 다쿠미는 극우 성향 일본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박해와 협박에 시달렸다.

한국땅에 한그루의 나무라도 더 심기 위해 노력하던 다쿠미는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 과로로 순직한다. 40세였다. 그의 서거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고, 그의 장례식에는 한일양국의 저명인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참여했으며,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소다 가이치가 다쿠미의 장례식을 집전했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 까지도 한복 수의(壽衣)를 입었고, 죽어서도 한국땅에 묻혀, 한줌 한국의 흙이 되었다.

저자소개

편저자 : 백 조 종(白 朝 鍾)

국내 여러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법학 등을 전공하다가 최종적으로 행정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는 도시계획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몇 년 후 다시 도시행정학으로 또 다른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오비린 국제대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서울시청 국제교류과에 근무했고, 서울시 공무원 교육원의 일본어 교관을 지냈다.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도쿄사무소에서도 근무했으며, 일본 호쿠토시 명예시민으로서 경기도 포천시와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의 자매결연을 성사시켰다.

중앙대 건설산업기술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지방의회 발전연구원 객원연구원, 한국해외연수센터 사무국장, 한국공동주택 관리실무전문교육원장, 범아관광학원 일본어 학감, 베세토 민제공사 사장, 韓中합자 중경상림 기계화공정 유한공사 부동사장, 동남건설 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서울국제친선협회(SIFO)부회장,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일본어 통역/번역가 및 출판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 강의와 강연으로 분주하다.

역서 : 3섹터 (중앙대 건설대학원장 황영주 교수와 공역)

논문 : 도시자치정부의 장기계획수립과정에 관한 비교 연구

논문 : 서울시 공공서비스의 민간화 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 : 국제법 기원과 주권론 - KCI(Korean Citation index 한국학술지인용색인)등재예정

(작가 파일용 이미지)

(작가 한마디)

다쿠미의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한 숭고하고 애틋한 사랑은 일본에서 영화, 뮤지컬, 논문, 타악 퍼포먼스, 연극, 전시회, 각종 이벤트 등으로 상당히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쿠미가 주로 활동했던 1)숲과 나무 2)목공예와 도자기 3)국제 교류 등 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서 다쿠미의 한국에서의 삶과 한국문화에 대한 사랑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의 미래 세대들에게도 널리 읽혀서, ·일양국간의 우정과 평화를 더욱 증진시키기를 바랍니다.

목차

축 사(한국측) : 이낙연

축 사(일본측) : 누카가 후쿠시로

머 리 말 : 이어령

발 간 사 : 조만제

1. 짧은 삶

1.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 유상용

2. 카인과 아벨 : 하마시타 마사히로

3. 적다색赤茶色 민둥산 : 박경구

4. 사람(サラム)과 사랑(サラン) : 모치즈키 쿠니오

5.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 백조종

2. 나무를 심는 사람

1. 식목일 행사 준비중 순직 : 김석권

2. 실용적인 육묘법 : 고바야시 후지오

3.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 김병윤

4. 새롭게 지주가 된 사람들은 : 15대 심수관

3. 공예

1. 인도 도예가 구차란 싱 : 하시모토 요리미츠

2. 해강海剛 유근형 : 유광열

3. 지순탁(池順鐸) : 지수구

4.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 오시마 마사히코

5. 다쿠미가 간다 : 문옥배

4. 박물관은 살아있다

1. 박물관 선배 : 김종규

2. 두 개의 보물 : 정양모

3. 조선민족미술관은 왜 세워졌나? : 김정기

4. 한국의 미를 찾아서 : 야마모토 슌스케

5. 외동딸 소노에 : 이시이 리에

5. 19314월 경성

1. 인간의 가치 : 아베 요시시게

2. 순결한 영혼 : 야나기 무네요시

6. 망우 공원

1.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 : 조경숙

2. 서울 국제 친선 협회 : 이순주

3. 이웃 아저씨 : 성기동

4. 청량사 : 구본설

5. 발복(發福) : 한상배

6. 사색의 길에 핀 성스러운 한 송이 꽃 : 정종배

7.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

1. 다카네(高根): 시미즈 치가미

2. 김성진! 그로부터 : 사와야 시게코

3. 일본측 아사카와 기념회 : 나가세키 후쿠지

4. 자료관 건립 과정 : 히나따 요시히코

8. 공공교류

1. 포천시 : 서장원

2. 호쿠토(北杜): 시라쿠라 마사시

3. 두 도시 이야기 : 츠치야 마사미츠

4. 크레아 서울 : 야스모토 도시오

5. 한복을 입은 일본인 : 강기홍

9. 민간교류

1. 다카사키 소지 : 하정웅

2. 하정웅의 메세나 : 김제윤

3. 기요사토 긴가쥬쿠 : 니시가와 히로토

4. 알폰클럽과 요델클럽의 산속 음악회 : 민완기

5. 조선오엽송으로 만든 아루프호른 : 나카가와 시게토시

10. 식민지

1. 반일 사상범 : 조용래

2. 쉰들러 리스트 : 백정필

3. 백자 달 항아리가 불러온 식민지배의 책임 : 허문도

4.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누워있는 : 오타 유키무라

5.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한 마키구치 : 이종수

11. 여행

1. 그의 고향에 서서 한일교류를 그린다 : 김찬영

2. 성지 순례 : 사와야 시게코

3. 클럽의 일본 방문기 : 조성주

4. 한일 우호 교류단 : 김병권

5. 설렁탕과 무김치 : 쯔치다 히사유키

12. 문헌과 논문

1. 편지 : 야나기 무네요시

2.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번역에 붙여 : 심우성

3. 인생의 반환점에서 느낀 진실한 사랑 : 김순희

4. 흰색 바지 저고리를 입고 : 에미야 다카유키

5. 낯선 산촌마을에서 흙투성이로 : 게이노 미스즈

6. 명예롭지 않은 문화유산 : 이나가 시게미

7. 교토의 귀무덤 vs. 망우리 다쿠미묘 : 박미정

13. 영화로 부활하는 다쿠미

1. 아름다운 스토리 : 나가사카 코지

2. 씨네마 천국 : 이춘호

3. 한일 공동제작 및 흥행 : 오자와 류이치

4. [백자의 사람] 2011년 가을 출간 : 박종균

부록 : 영화 협력 제안서

14. 한국의 미래세대

1. 가슴 속 메아리 : 이승철

2. 꿈에라도 조선인이 되고 싶어 : 김지인

3. 세계 국민으로서의 자세 : 금중혁

4. 한국 청소년의 생각 : 최이주

5. 꿈과 희망의 등불 : 성종찬

6. 삶의 스승 : 하진성

7. 사용자 예술가 : 박성훈

8. 봉사정신이 강한 집안 : 오준호

9. 소나무를 좋아했다고 : 이한별

10. 당신 같은 사람이 앉을 곳이 아니야 : 이경희

11. 글로벌 인물 : 김예경

12.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 : 김민성

13. 한류 열풍 : 곽진원

14. 우리의 공예품 : 김예림

15. 자국의 문화제는 자국에 있어야 : 한미루

16.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경향 : 조우상

17. 천사라고 불러도 : 정재호

18. 코리아삼성, 코리아LG : 박세은

19. 차가웠던 일제시대 : 안광찬

20. 인류애 : 조호철

맺 음 말 : 최서면

편저자 후기 : 백조종

책속으로

야마나시현 지역은 옛 이름이 가이쿠니甲斐國로서 전국시대의 맹장 타케다 신겐의 영지이다. 오래전 [카케무샤]란 영화로 한국에도 신겐의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소설가 최인호 원작의 해신이란 드라마에도 타케다 신겐의 선조에 얽힌 역사가 소개되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중국으로 공부를 떠났던 일본스님이 귀국길에 풍랑을 만났는데, 바다에서 홀연히 나타난 바다의 신인 신라명신이 명한다. “풍랑을 가라앉혀 줄 테니 일본에 돌아가면 나의 초상을 그리고 절에 보존하라최인호는 소설 해신에서 그 신라명신이 장보고의 현현이라고 보고 있다. 그 절을 세운 가문은 신라명신의 초상을 모시고 수장의 이름마저 신라사부로라고 바꾸게 된다. 신라사부로는 일본 사무라이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며 그가 바로 타케다 신겐의 선조인 것이다.

-본문 26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고 결혼 후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는 저자의 그러한 마음에 깊이 공감한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늘 한국을 그리워하시면서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오니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에 시달렸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일본의 가치관을 가지고 한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본에서 조센진朝鮮人이라고 돌멩이 세례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 라는 인간을 키워준 토양인 일본을 사랑한다.

조국에 이바지하고자 우리나라 사람과 결혼해 귀국했지만, 한국어 발음이 이상하다며 쪽발이라고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핏줄인 한국을 사랑한다.

-본문 309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회장님은 오래전부터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은 문화를 전해준 문화대은의 나라, 심지어 형님의 나라, 스승의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그동안 저지른 한국에 대한 만행을 반성하고 한국의 은혜에 보답해야한다라고 일본 내에서 일관되게 주장해 온 분이다. 그리하여 한국에 대해 은혜를 갚는다는 차원으로 여러 가지 정신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 등에서 실질적으로 한국에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우리나라의 각급 시,,구 등에서...

-본문 269

다쿠미가 섬세하고 자상한 성격이었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다쿠미는 18911월 야쓰가다케 산 남쪽 기슭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아버지는 안 계셨다. 어린 다쿠미가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형이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실을 부러워하고, 어머니께 우리 집에 출입하는 나무꾼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으냐고 묻고, 또 누나에게는 만약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눈 하나가 찌부러져도 좋겠는데라고 말할 정도였다.

다쿠미와 그 형의 우애는 남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형은 다쿠미보다 여섯 살 위였는데, 다쿠미는 어려서부터 형을 깍듯이 섬기며 그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고 들었다. 예전에 형이 이질을 앓아 집에 돌아와 요양할 때, 그가 형을 위해 아침 일찍 부근의 농가에서 갓 낳은 계란을 얻어오기도 하고, 또 손수 뒷산 대숲에서 대나무를 베어서 통발을 만들어 논물이 나오는 데 놓고서, 병을 앓고 난 형을 위해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 뒤 다쿠미는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아키다현의 어느 산림 경영 사무소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헤어지기 아쉬워서 준 돈을 졸업하면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서 부득부득 받지 않고 그것을......

-본문 144

관련자료 - [조선민족미술관]

일제 강점기, 192449일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서 조선민족미술관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것은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민간 미술관이었다. 야나기는 노리다카가 1914년 선물로 가져온 조선의 청화추초문모깍이 항아리에 눈을 떴지만,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은 1920년 초겨울 동생 다쿠미가 지바(千葉)의 아비코(我孫子) 자택을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그때 야나기는 다쿠미를 통해 그가 몇 년간 조선에 살면서 터득한 조선민예의 독창적인 미에 눈을 떴음이 분명하다.

야나기는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한 것은 조선의 우수한 민예품의 불행한 산일(散逸: 흩어져 없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도자기를 비롯한 조선공예품이 무차별적으로 일본에 반출된 데 대한 항의의 뜻도 있을 것이다.

야나기는 조선민족의 저 우수한 작품이 우리의 마음과 깊이 교류할 날이 올 것이라는 신념과 그 작자로서의 민족이 우리 마음의 벗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완수하기 위해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출판사 리뷰

다쿠미는 조선 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했다. 당시 조선의 산들에 대해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지적법에 의해 많은 토지가 소유자 부재라는 억지 주장을 하며 몰수했다. 그리고, 그 토지와 임야를 일본으로부터 온 이민자나, 일본정부에 협조적인 조선인에게 차례차례로 불하해 버리고 있었다.

새롭게 지주가 된 사람들은 토지에 집착이 없고 곧바로 나무를 벌채해 팔아 버린다. 한반도의 산들은 단단한 암반이며 거기에 얇은 표토가 가리고 있다. 민둥산이 된 조선의 산들은 금새 보수력을 잃어 홍수를 일으켜 버리게 되었다. 홍수와 가뭄으로 조선 민중이 겪는 고통은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에 마음 아파한 다쿠미는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을 고안해 조선의 많은 산들을 복원했다. 현재 한반도 산림면적의 약 37%가 다쿠미의 노천매장발아촉진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녹지라고 하며, 다쿠미가 개발한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은 오늘날 미국에서도 각광받는 육묘 및 산림녹화 방식이라고 한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고 주장하며,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속국인 한국을 구원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자체가 중국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쿠미는, 조선의 밥상을 예로 들어, 조선의 문화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문화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원초적인 근간은 문화이다. 조선인들의 식문화가 펼쳐지는 인 소반(밥상)이라는 것은 온돌방에 둘러 앉아 식사하던 한반도 특유의 것으로 중국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다쿠미는 소반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이 일상 사용하는 많은 [생활공예품]들을 통해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다쿠미는,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문화적 독립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의 조선의 외교적 독립도 확신했다. 그리고 염원했다. 실제로 다쿠미가 죽고 14년후에 조선은 독립되었다.

[조선 도자기의 ] 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은, 조선사람이 아닌, 일본인 아사카와 노리다카이다. 노리다카는 일본에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일본도자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며, 일본도자기의 원류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 심취하게 된다. 졸업후 한국의 도자기를 연구하기 위해 조선땅으로 건너와 미술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조선의 공예, 도예를 연구하게 된다. 노리다카는 그 자신이 직접 회화나 조각도 했지만, 그 보다는 조선의 공예와 도예에 대한 연구가(硏究家) 및 컬렉터(collector)로서 더욱 빛을 발했다. 노리다카의 성장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복자로 태어난 막내 동생이 다쿠미이다. 다쿠미는 농업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형이 있는 조선땅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 공무원으로 일한다. 다쿠미는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기 위해 조선의 온 산야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학교에 몸담고 있느라 필드(Field)연구에 제약이 컸던 친형 노리다카를 위해, 조선 각지의 가마터에서, 도자기와 도자기 파편을 구해 형에게 제공했다. 노리다카가 [조선 도자기의 ]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생 다쿠미가 [조선 도자기의 천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총독부 공무원이었던 다쿠미는 길에서 조선인 걸인을 만나면, 남자걸인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여자걸인에게는 수중에 있는 돈을 전부 다 쥐어주었다. 다쿠미는 시내의 일본인 밀집지역에 살지 않고, 조선인 마을에서 조선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다쿠미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어를 썼으며, 일본순사의 조선인 박해를 조선인들과 함께 감내해냈다. 다쿠미는 아이들을 귀여워해서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과자를 사서 나눠주곤 했다. 다쿠미는 당시 조선 최고의 인텔리 였던 [폐허] 동인지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소작농이나 천민 출신의 조선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다. 다쿠미는 사람을 대할 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국적도 종교도 초월했다. 다쿠미가 죽자, 서로 다쿠미의 상여를 매겠다고 나선 조선인들로 인해 청량리의 교통이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당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저항하고 있던 동아일보였지만, 조선 총독부 임업연구소 소속의 日人공무원의 사망에 대해서 사실상의 추도기사를 냈을 정도였다.

다쿠미의 고향은 야마나시현 호쿠도시 다카네정이다. 1000년전 신라의 삼국통일로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해서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이다. 다쿠미에게는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추천평

한국인이 보존하는 단 하나의 日人 무덤

묘비에는한국의 산과 민예(民藝)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혀 있다.

- 허문도(통일부장관)

당시 아사카와를 흠모했던 경성제대의 아베 요시시게 교수는 총독부가 아사카와를 반일 사상범으로 문제 삼을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조용래(국민일보 논설위원)

아사카와 다쿠미의 헌신적인 한국사랑에, 한일간 미래가 희망적이라 믿습니다. 우리 민족이, 현재 시련을 겪고 있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바탕이라 믿습니다.

-이어령(문화부장관)

이 책은 인간의 삶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강렬하게 시사하는 경이로운 인생독본입니다. 자식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소중한 책입니다.

-이낙연(한일 의원 연맹 간사장)

다쿠미는 조선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어를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하여, 생활과 일을 통해서 조선어를 익혔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 하는 일도 없었으며, 조선에 뼈를 묻을 각오로 생활을 했던 그의 아름다운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카가 후쿠시로(일한 의원 연맹 간사장)

다쿠미의 책은 한국미술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늘 그 내용을 여러 모로 참고해야 하는 책이고 특히 우리 공예(木工藝)와 도자사(陶磁史)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보물 같은 책이다.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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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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